만나고 싶었습니다 | 홍진훤 슬롯 추천를 만나다
사진 기자로 경력을 시작한 홍진훤의 이름 뒤에는 미술 작가, 영화감독, 프로그래머 등 여러 직업이 따라붙는다. 그의 작업은 온라인 웹부터 미술관에서 상영되는 영상까지 다양한 형식과 조건 아래 존재하는데, 이들이 모두 현대 한국의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맴돌고 있다는 점만은 공통된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의 한때를 승리로 단정하거나 신화화하려는 움직임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다. 그는 종종 현재시제의 인터뷰와 철 지난 아카이브 푸티지를 맞붙여 과거가 현재를 배반하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은 최근 ‘미디어 아카이브의 불가능성’(<오르트 구름>, 아르코미술관, 2025), ‘노스탤지어’(<포에버리즘>, 일민미술관, 2024), ‘세상의 역학’(<2024부산비엔날레>, 2024)을 다루는 전시장에 자리했다. 지난 1월, 경기도 파주시에서 홍진훤 작가를 만나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시간에 대해 물었다.

한 발 떨어져 격동의 시대를 바라보기
대학 시절 틈만 나면 집회 현장을 구경하러 나갔다는 홍진훤 작가는 카메라를 들고 그곳을 보는 일이 좋았다며, ‘구경꾼의 입장’과 ‘공포감’으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그는 “대학에 다니던 2000년 전후에는 △IMF △비정규직 △학과 통폐합 △이라크 파병 △FTA 등을 두고 오만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카메라를 들고 집회를 찍기 시작한 것은, 집회 현장의 무서운 경찰이 카메라를 든 사람은 때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구경꾼의 신분을 보장받기 위함이었다. 그는 “초반에는 여러 대형 집회를 흥미롭게 구경하다가 우연히 소규모 농성장에 방문했는데, 지금껏 보지 못한 현장에서의 역학이나 집회 간 권력이 눈에 들어왔다”라며 “처음으로 현장이란 드라마처럼 남 일 보듯 구경할 일이 아니구나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홍 작가는 이때 찍은 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리기 시작했고, 이를 본 동료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 사진 기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런 시간을 거쳐, 홍진훤 작가는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형식과 내용에 적용하는 몇 가지 규칙을 세웠다. 여기에는 몇 해 동안의 사진 기자 일을 그만둔 뒤, 소위 말하는 ‘저널리즘 사진 스타일’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심이 개입했다. 그는 이 규칙이 “초광각·초망원을 지양하고, 걸어찍기* 하지 않고, 별다른 이유 없이 수직과 수평을 흩뜨리지 않으려 한 것”이라며 “전통적으로 저널리즘 교육에서 강조되는 라포 형성을 경계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여러 현장에 머무르거나 드나들면서도, 그곳의 당사자와 대면하거나 사적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홍 작가는 “그들의 투쟁에 동의할지라도 내 작업이 할 일은 그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이런 태도가 객관성을 지향하기 위함만은 아니라면서, 자신의 역할은 ‘풍경과 풍경 사이에서 발현되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작가가 원칙을 세워 현장과 거리를 둠으로써 기대한 효과란 무엇이었을까. 홍진훤 작가는 “사회적 비극이란 단순히 ‘나쁜 놈’이 ‘착한 놈’에게 해코지해서 일어나기보다, 복잡다단한 욕망과 환경이 굳건한 시스템과 맞물려 발생하는 것 아니냐”라고 되물으며, 상황에 대한 작가의 선제적 판단이 작업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이는 결국 그의 작업이 유용성을 가질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왔다. 작가의 판단이 강하게 개입하는 작업은 보는 이가 그 안에서 길을 잃은 채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봉쇄하는데, 이는 미술의 목적과 가치를 해쳐 결국 개별 작업의 유용성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걸어찍기: 화면 구석에 대상을 배치한 뒤 원경에 초점을 맞춰 촬영하는 구도. 보도 사진에서 자주 사용된다.
신화화된 역사, 의심하고 현재시제로 끌어올린다
<멜팅 아이스크림>(2021)은 과거의 정치적 움직임을 복원해 눈에 보이는 상태로 변환하려는 욕망을 1시간 분량으로 펼쳐 놓는다. 수해를 입은 민주화 운동 기념재단의 창고에서 중요한 기록으로 추정되는 사진 필름이 훼손된 채 발견되고, 작가가 이를 복구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데서 영상의 시간은 시작한다. 필름의 복원 과정을 담은 클립이 1980년대 현장을 증언하는 중년 사진 기자들의 인터뷰와 교차하고, 사이사이에 현대 한국의 비정규직 투쟁 기록이 반복해 등장한다. 홍진훤 작가는 “민주화 운동을 기록한 이들의 활동은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면서도 “그들의 영웅담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라고 일축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민주화 운동 당시의 중요한 정황이 담겼을지 모르는 필름 복원은 ‘조직이나 세력이 어떤 운동을 복원한 뒤 아카이브에 박제하고 싶은 욕망’이다. 홍 작가는 “그렇게 가시화된 역사가 권력으로 작동하면 그 반대급부는 당연히 권력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목적 아래 수행되는 복원 작업이 시각화할 권리를 두고 다투는 전장으로 느껴졌다”라고 설명했다.
근작 <더블 슬릿>(2024)은 상영 시간 내내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양분된 채, 양쪽에서 각각 다른 영상이 나오거나 단일한 장방형 영상으로 채워졌다. 홍진훤 작가는 이 같은 형식 역시 시각 권력의 분배를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고 말했다. <멜팅 아이스크림>을 여러 차례 극장에서 상영한 후 그는 관객에게 관람을 강제하는 극장의 권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관객에게 할 일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라며 “화면을 양분하고 좌우에서 각기 다른 영상을 재생해 사람마다 관람 이후의 경험이 조금씩 어긋날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라고 시네마스코프와 화면 분할을 채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더블 슬릿>의 주요 등장인물 중에는 출연을 극구 사양하던 노동 운동가가 있다. 작가는 “이 영화는 아주 이상할 것이며 당신을 결코 영웅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 끝에 그의 출연을 성사시켰다. 그렇게 <멜팅 아이스크림>과 <더블 슬릿>은 어느 특정 세력의 승리를 선언하지도, 역사의 공고화에 대해 합의를 이끌어내지도 못한다는 공통점을 갖게 됐다.
*시네마스코프: 1953년 개발된 영화용 화면비율. 일반적으로 2.39:1의 비율이 채택된다.


미술과 저널리즘에 걸어둔 기대는 유효한가
홍진훤 슬롯 추천의 영상 작업에는 과거 방송 매체 등에서 촬영된 아카이브 푸티지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그는 카피레프트*를 비롯한 오픈소스에 관심이 있다. 홍 작가는 “내 이름을 건 작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자산이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다”라고 운을 띄웠다. 이어 그는 “작가에게는 창작의 동기가 되거나 그가 영향을 받은 지식과 정보 체계가 먼저 있었을 것이고, 때로는 타인의 촬영물을 가져와 붙이기도 한다”라며 “그렇다면 미술 작업이란 복잡다단한 사회적 자산의 반영이니 어떻게 이것을 작가 개인의 소유물로 귀속시키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라고 전했다.
미술과 저널리즘은 모두 ‘주류의 관성’에 맞서야 한다는 숙명을 가졌기에, 불편부당함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 홍진훤 작가의 직업 윤리다. 자신의 판단으로 관객을 선제하기를 경계한다는 그의 입장은, 당파성이나 정치적 입장을 갖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홍 작가는 “미술과 저널리즘은 모두 주류 이데올로기라는 강력한 힘에 저항해야 하지 않나”라며 “특히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자신은 어느 편에도 서 있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관성을 강화하고 그에 종속된 태도”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술의 존재 이유는 주류와 관성을 인식하고 있는 매체라는 점에 있다”라며 “꼭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이 아닐지라도, 기존의 시각 형식에 대한 도전은 계속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홍진훤 작가는 ‘미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는 케케묵은 질문에 “그렇다”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는 모호함이 미술 작업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상황이 선후관계가 뒤바뀐 것이라는 비판을 품고 있다. 작가는 “좋은 작업은 판단을 유보한 채 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에 관해 얘기한다”라며 “주류의 입장은 세상의 일을 쉽게 분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파고들어 고민과 의심을 연장하는 것이 좋은 미술 작업”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이어 그는 집회나 시위만이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며 “그렇다면 운동을 한다고 세상이 바뀌느냐”라고 되물었다. 그는 직설적이고 급진적인 구호를 내세우는 사회 운동조차 관성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기존의 입장을 의심하고 싸우기 시작한다면 무엇이든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카피레프트: 지식과 정보의 독점에 반대하며 이것이 자유롭게 활용돼야 한다는 믿음 또는 운동.
역사의 승자를 지목하고, 이 상황을 기록할 권리는 언제나 욕망의 대상이다. 이를 향한 싸움은 만성적이며, 쉽게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홍진훤 작가의 영상은 이런 시선의 위치를 끌어내리거나 그 자체에 균열을 낸다. 그의 작업은 어떤 정답도, 단일한 승자도 제시하지 않지만 바로 그 불확실성과 틈 속에서 다른 시선과 해석이 들어설 여지를 만들어 낸다. 지금 한국 현대사를 발췌한 스크린 앞에서 ‘시각 권력’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함께 쟁취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