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관계는 부조리하다.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는 사소하거나 불가피한 이유로, 연결과 동시에 단절을 필연적으로 예고한다. 도래한 단절과 도래할 단절을 떠올린 순간 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이어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품었고, 이내 고독과 허무, 권태라 부를 만한 정서가 나에게 일었다. 알베르 카뮈,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작가들의 세계에 빠져든 것도 이때쯤이었다. 비교적 깊은 관계에서 인간관계의 존재 이유를 찾아보려 했으나 이는 좌절감을 더할 뿐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타인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의 껍데기와 너의 껍데기가 만나 관계를 이룬다. 따라서 진실된 관계는 없고, 진실된 척하거나 진실에 가까운 관계만이 존재한다. 몰이해 혹은 이해 부족에 기반한 관계는 반드시 크고 작은 상처를 서로에게 남겼고, 상처를 봉합하는 나의 머릿속에는 어김없이 단절이 떠올랐다. 단절을 극복하려 힘쓰며 도달한 끝에서 주어지는 선물이 단절이라면, 인간관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관계를 회피하는 삶은 또 다른 고통과 결핍을 낳는다. 그렇기에 설령 무의미하다고 해도, 살아가는 한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세상으로 나온 직후부터 인간의 삶에는 시시때때로 타인과의 직·간접적인 교류가 틈입하고, 인간관계의 생성 또는 유지 및 발전은 반복되며 배제할 수 없는 일상의 일부가 된다. 한편 넓게는 생존 본능, 좁게 말하면 ‘잘’ 살고자 하는 욕망도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게 한다. 사회는 홀로 선 개인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고립된 존재로 인지하고, 부적응과 비정상의 낙인을 겹쳐 찍는다. 개인은 매 순간 살아남기 위해 타인과 연결되려 치열하게 노력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관계의 무의미함과 필요성을 동시에 절감하는 양가적인 상태에 빠진 대다수의 사람은 당장의 불편감을 해소하기 위해 한 가지 계책을 실행한다. 관계의 부조리한 현실에 실망한 그들은 자아를 조각내 상대의 입맛에 맞춘 자아의 파편, 즉 연기된 페르소나로 상대를 대한다. 우리는 이를 흔히 ‘사회생활’이라 부른다. 사회생활에 능통한 사람들은 사회에 수월하게 적응하며 언뜻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중 일부는 파편화된 자아가 ‘나’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하고는 한다. 관계가 확장될수록 그들의 진정한 자아는 희미해지고, 군중 속에서 ‘나’는 길을 잃는다.
그러니 나는 인간관계의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멀리 떨어진 점으로 보이던 단절이 명료한 선이 되고 어느새 양감을 지닐 때까지는 타인을 힘써 이해하려 한다. 인간이 지닌 여러 고유한 능력 가운데 감수성으로. 한 인간의 삶에는 맥락이 있다.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나는 타인의 삶을 구성하는 일련의 순간들을 기억하지만 이는 가시적인 범위로 한정된다. 순간과 순간 사이 보이지 않는 찰나에도 그들은 흐르듯 살아 있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과 사고가 그들에게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 찰나가 공백으로 남는다. 나는 섬세하고 예민하게 나의 감수성을 제련하고 활용하며, 타인의 말과 표정 그리고 행동 너머에 존재할 맥락을 유추하려 한다. 겉으로 드러난 순간과 순간 사이의 공백을 색칠하며, 타인의 본질에 조금이나마 더 다가가고자 애쓰려 한다.
타인을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영원한 관계는 없다. 그럼에도 지금 눈앞에 둔 타인의 맥락에 공명하고 시야의 빈틈을 메우기를 포기하지 말자. 내던져진 세상 속에서 의지할 버팀목을 찾기 위해.